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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숙명(宿命)과운명(運命)

무욕(無欲) 은 대욕(大欲) 때문일까.

선객은 스스로가 인간은 끝내 견성하지 않으면 안 될 고집(苦集;고통의 덩어리)

존재임을 자각하고 스스로 고()의 땅 위에, ()의 집을 짓고,

()로써 울타리를 치고, ()의 옷을 입고, ()를 먹고,

()의 멍에를 쓰고, ()에 포용된 채, ()의 조임을 받아가면서도

()를 넘어서려는 의지만을 붙들고 살아간다.

만약 이 의지를 놓친다면 그때는 생의 모독자가 되고 배반자가 된 채 암흑의

종말을 고할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 운명적으로 붙들 수밖에 없다.

선객은 숙명의 소산이 아니라 운명의 소조(所造)이다

숙명은 자기 이전에 던져진 의지와 주어진 질서여서 생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사실이지만 운명은 자기 자신의 의지와 자유로이 선택한 후천적인 현실이다.

그래서 숙명은 필연이지만, 운명은 당위(當爲), 숙명이 불변이라면,

운명은 가변이요, 숙명이 한계성이라면, 운명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갑부(甲富)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하고 거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숙명의 소산이라면

자라서 갑부가 된것은 운명의 소조이다.

내가 이나 벼룩으로 태어나지 않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숙명의 소치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종교에 귀의하고 정진 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운명의 소조에서다.

현재의 나는 숙명의 객체이지만 운명의 주체이다.

숙명은 자기 부재(不在)의 과거가 관장했지만 운명은 자기 실재(實在)의 현재가,

그리고 자신이 관장하는 것이어서 운명을 창조하고 개조할 수 있는 소지는

운명(殞命)직전까지 무한히 열려져 있다.

숙명의 필연성을 인식하면 운명의 당위성을 절감하게 된다.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숙명적인 것을 피하려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하며

운명적인 것은 붙잡고 사랑해야 할 뿐이다

고집(苦集)의 표상과 같은 누더기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선객이야말로

견성의 문턱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내 운명은 타기될 것이 아니라 파지(把持; 움키어 가짐) 되어야 함은

선객의 금욕생활이 극한에 이를수록 절감되는 상황 때문이다.

- 지 허 스 님 지음 < 선 방 일 기> 중에서 일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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